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 때로 잘못된 믿음은 범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 때문에 유기적으로 발생하고, 마지막에는 새로이 정체성이나 이익집단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 어떤 이유로든 새로운 구성원들이 합류한다. 결국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팀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편에 서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든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르는 냉소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추종자들과 대화함으로써 과학 부정론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편이 중 요하다. 허위 정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행위를 폭로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과학 부정론을 극복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일단 거짓말이 떠돌고 나면 설사 거짓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과 대화해야 한다. 누군가가 부패나 불법 행위를 밝혀낼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대항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 거짓말들이 냉소적인 외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생산되었든 우리 자신의 정신적 상처나 자아에 의해 만들어졌든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 과학 부정론은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즉 더 많은 사실을 제공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과학 부정론자의 마음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그들을 증거에 대해 논증하는 법은 이미 알지만 데이터가 없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동료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많은 증거도 과학 부정론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 범위를 최대한 넓혀보면, 과학 부정론은 특정 과학 이론의 내용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그 이론들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치와 방법들을 공격하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과학 부정론자들은 과학자들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실관계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처럼 증거를 가지고 부인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증거에 대해 논증하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해야 한다.다른 가치들을 접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도록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 스티브는 전반적인 이슈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꿔놓은 심오한 이아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석탄 광부는 운명론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하서야 해요. 이 일은 일종의 느린 죽음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노동절 전 금요일에 워싱턴 카운티에서 사망한 25세 광산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데이비드와 에린을 통해 들은 터였다.(...) 나는 방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잠시 침묵했다. 광부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잡아놓고 매일 일하러 가기를 불사했다면, 지구나 타인의 건강이 위험에 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아마도 먼 나라 이야기일 텐데? 이것을 냉정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들은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른 뭐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 신념과 가치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내가 처음 가졌던 의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전에 원하지 않았던 것을 믿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맞닥뜨린 질문은 ‘어떻게 하면 누군가가 이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살펴야 할 이슈는 부정론자들이 비합리적인 견해를 바꾸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런 견해가 어떻게 그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능을 하는지 이해할 때까지 더 깊이 탐구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몰디브의 보트에서 대화했던 아이는 그 관심의 불꽃이 꺼져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가 몰디브 바깥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죠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그곳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디브 바깥 사람들은 왜 그럴까? 그 이슈가 자신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몰디브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일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는 결국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에서 '우리가 왜 그것과 관련된 뭔가를 실행하기 위해 경제적 손해를 입어야만 하는가?’로 진화한 최근의 부정론 전략을 극복하는 문제로 압축되는 듯하다.

🔖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도 약간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치부하는 일은 얼마나 솔깃한가. 혹은 그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고 화제를 바꿔버리는 일은 또 어떤가. 왜냐하면 우리는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선 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는 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현명해져야 한다. 단순히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또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그들의 신념에 대해 창피를 주는 일은 확실히 무익하다. 목표가 실제로 누군가의 부정론 신념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신뢰와 친밀한 관계 구축에 전념하면서 최대한 공감과 존중의 자세를 가지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

🔖 우리가 과학 부정론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필수 무기 중 하나이며, 그것은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나는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만일 과학자들이 (심지어 잘 모를 때도) 정답을 아는 척한다면 부정론자들이 의심과 불신의 눈으로 허점을 찾아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와젤은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신뢰를 강요할 수는 없다. 겸손하고 투명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통해 믿음을 얻어야 한다.”

🔖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과학 교육에서 시작된다. 내가 초등학생 때 과학자는 실수하지 않는 천재라고 배웠는데, 지금 우리가 마침내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예전에 비해 정말 많이 달라졌을까?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들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했던 추측, 실패, 불확실성, 시도를 가르치면 어떨까? 물론 과학자들도 실수를 하지만, 그들의 특별한 점은 증거로부터 배우는 방식과 같은 증거에 의지하는 삶의 태도를 몸으로 익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개방성, 겸손,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정직, 투명성, 자신의 연구를 엄격한 시험대에 올려놓는 용기 같은 과학자의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입증하는 식으로 과학의 가치에 대해 교육하면 어떨까? 나는 이런 종류의 과학 교육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과학 부정론을 이겨내 는 데 큰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 이는 아이들에게 과학자처럼 사고하는 법을 일깨워주고,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고, 그러고 나서 답을 찾기 위해 경험적 증거를 추구하도록 만든 다. 즉 모델의 예측을 계산하고 나서 그 예측이 틀릴 경우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과학적 불확실성의 가치를 좀 더 빨리 이해시켜줄 수 있고,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수 있다.이런 맥락 안에서 과학의 사실은 더 합리적일 수 있고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도 그에 비례하여 커질 것이다.

🔖 몰디브의 어부들을 기억하는가? 지금 공공 정책에서 그 어느 때보다 과학적 사실과 합리적 주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따라서 정보 부족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고 해도) 그만큼 심각한 또 다른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소비를 줄일 수 있을 정도인가? 대체 연료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념뿐 아니라 행동에도 변화를 주고자 하는가?

과학 부정론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 신념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가치 있다고 정의하는 관심사의 폭을 넓히는 경지까지 도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편적 인간성을 지향해야만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도 여전히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동료 인류와 우리의 미래 모두에 투자하는 일이다. 우리는 과학 부정론자들의 관심사를 넓혀주고자 노력하는 한편으로 그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범위도 확대해나가야 한다. 누군가와 편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틀렸음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할 만큼 충분히 그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만남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식론적이고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신뢰와 공감에 이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백신 거부자, 반진화론자, 평평한 지구론자, 기후변화 부정론자 등에게 과학을 칭송하는 모임에 그들 모두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줄 뿐 아니라, 마침내 우리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한 모두가 중요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결론을 공유하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몰디브의 어부와 펜실베이니아의 석탄 광부, 백신을 불안해하는 부모와 코로나 위기를 헤쳐가는 의료 최전선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죠.” 몰디브의 보트 위에서 소년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구상한 활동 계획을 실천하여 신뢰를 다시 구축할 수 있다면 믿음과 돌봄과 실천의 문제를 한거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거대하지만 과학의 특별한 힘은 아마도 미래를 위한 희망의 가장 위대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인식이다. 지구온난화나 치명적인 전염병의 결과에 관한 한,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